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바 미사일 위기 (문단 편집) === 발각과 미국의 대응 === 그레이엄 앨리슨이 쿠바에서 소련군이 미사일 은엄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기술하여 이것이 한때 정설로 자리잡혔으나 2022년 5월 러시아 국방부가 공개한 문서는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련군이 바보도 아니고 비밀 작전에서 미사일 은엄폐가 중요한 줄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포병 출신인 전략군사령관 비류조프는 본국에 미사일 은폐에 문제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보고를 올렸으며 5월 24일 국방상 말리놉스키와 총참모장 자하로프는 쿠바에 51미사일사단을 비롯한 4만명의 소련군을 배치하는 계획을 흐루쇼프에게 제출하였다. 흐루쇼프는 이를 5월 27일에 승인하였고, 7월에 스타첸코 장군을 비롯하여 소련 군사고문단을 쿠바에 보내서 기지를 건설하게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군사고문단 2진이 악천후로 바하마 나소에 긴급착륙하는 바람에 공항에 가득있던 미국인 관광객들에 발각되었고 소련 당국이 대외적으로 발표한 이들의 쿠비 방문 목적과 이들의 비자의 명목상 체류 목적도 다른 등 실수가 연발했다. 거기에 소련 군사고문단은 스페인어도 몰랐으며 쿠바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었고 소련에서 가져온 각종 중장비들은 북미 전압체계와 호환이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는 등 개판 5분전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비류조프가 호언장담한 야자수를 통한 은엄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소련 군사고문들은 경악하여 미사일 기지 건설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으나 소련군 총참모부는 이미 지도부의 승인을 얻은 계획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이를 묵살했다. 때문에 소련군이 은엄폐의 중요성을 알았음에도 상부 눈치를 보느라 은엄폐는 개나 줘 버린 엉망진창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심지어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에게 미사일 은엄폐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기 위해 쿠바에서 온 군사고문 알렉세이 데멘체프에게 입 닥치라고 걷어차기까지 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쿠바 미사일 기지.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CubaSites1962_1.jpg|width=100%]]}}}|| || 미국 정찰기에 찍힌 쿠바 미사일 기지. || 미 국방부가 공개한 소련이 쿠바에 구축해 둔 병기들의 상황 || 하지만 이 엉망진창의 공사는 기적적으로 3개월 이상 미국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8월에는 CIA가 소련이 쿠바에서 뭔가를 한다는것을 눈치챘지만 소규모 군사지원 정도로 여겼으며 소련군의 공사를 방해한 허리케인과 악천후는 미국의 정찰도 방해해서 짙은 먹구름이 소련군을 은폐해 주었다. 하지만 기적은 3개월 후 기상조건이 호전되면서 끝났고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가 찍은 항공사진이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펜타곤]]과 [[백악관]]에 전달됐다.[* 재미있게도 U-2의 쿠바 정찰은 당시 정권이 [[사회주의]]에 너무 유약하다며 공세를 펼치던 공화당원들의 압력으로 빈도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전에도 [[미국 중앙 정보국|CIA]]의 첩보 활동으로 쿠바에 [[핵무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는 이전부터 파악되고 있었지만 케네디는 증거가 없다며 이를 믿지 않았다. 쿠바에 미사일이 들어갈 때는 소련 [[총참모부]] 특별팀과 정보 기관이 집행했기 때문에 완벽한 보안을 유지했다.[* 미국의 눈을 속이기 위해 쿠바로 향하는 배들에는 마치 시베리아나 북극권으로 가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스키를 포함한 각종 동계용품들이 같이 선적되었다. 승선원들은 물론 함장과 함에 동승한 정치위원까지 최종 목적지가 쿠바라는 사실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한 이후에나 알았다.''' 쿠바에 도착한 이후에도 스파이의 눈을 속이기 위해 트럭행렬을 여러 개 만들어서 쿠바 내 어느 곳이 진짜 미사일 기지인지를 철저하게 속였다.] 하지만 들어간 뒤에는 보안이 형편없어졌는데 이 일을 쿠바 주둔군 사령부에서 인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둔군 사령관은 [[육군]] [[포병]] 출신의 이사 플리예프 장군이었다. 흐루쇼프의 총애를 받는 플리예프는 가짜 여권으로 입국했지만 정체가 들켜도 [[전략로켓군]]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로켓과는 관계 없다고 판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원하던 사령관 자리는 못얻었어도 부사령관과 [[참모]]들은 전부 전략로켓군 출신이 차출되었다. 서로 출신이 다른 부대들은 융화되지 못했고 쿠바에서 각자 하던 대로 임무를 수행하다 모순된 행동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기밀 임무였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환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 임무만 수행하게 되어 더더욱 조율이 되지 않았다. 이때 [[GRU]] 소속 소련 정보장교인 '''올레그 펜콥스키''' 육군 포병 대령이 R-12 미사일 특유의 발사대 모양과 배치 형태가 담긴 자료를 GRU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입수해 [[MI6]]와 [[CIA]] 요원에게 전달[* 펜콥스키는 [[독소전쟁]] 당시 최연소 연대장으로 활약했고 군부의 실세였던 바렌초프를 장인어른으로 두고 있었던지라 출세에 탄탄대로가 열린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 내전]] 당시 전사한 백군 장교'''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소련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소련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서방세계에 협조하는 스파이로 전향했다. 결국 10월이 다 가기도 전에 간첩 혐의로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고 1963년 [[KGB]] 본부 지하실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간첩 활동에 관한 내용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더 스파이]]로 극화되었다.]했기 때문에 저 소련군의 주둔지가 미사일 사일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에 비상경계가 발령되었고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미 의회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앤틸러스 열도 -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쿠바 미사일 위기/m_crs_01.jpg|width=100%]]}}}|| ||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가상 전황도 || 문제의 지도. 중간 크기의 원은 쿠바에 이미 배치했던 R-12의 사정거리고 가장 큰 원은 그 다음 배치하려던 R-14의 사정거리다. 이미 배치된 R-12로도 수도인 워싱턴 D.C. 타격이 가능한 데다 R-14로는 [[워싱턴 주]]와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 소련 극동 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대통령]]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소집했다. NSC 멤버 중에서도 핵심 참모들이 집행위원회(EXCOMM; Executive Committee)에 참여했는데, [[린든 B. 존슨]] [[미국 부통령|부통령]], [[딘 러스크]] 국무장관[* [[대한민국]] 입장에선 악연이 꽤 있는 인물이다. [[8.15 광복]] 당시 [[미군정]]의 점령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삼팔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초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러스크 서한]]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에 관한 일본 측의 논리를 보태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미합중국]] 합참의장 [[맥스웰 테일러]] [[미합중국 육군|육군]] [[대장(계급)|대장]],[* HBO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한 [[제101공수사단|제101공중강습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그 테일러 장군이다.] [[존 맥콘]] CIA 국장,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어 소렌슨]] 특별보좌역[* Theodore Sorensen.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모든 의사 결정에 참여한 핵심 참모. 『자, 미국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自問해 보십시오』"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구절로 유명한 대통령 취임사도 소렌슨의 작품이다.],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 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외쳤다. 특히 [[미합중국 공군]] [[대장(계급)|대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EXCOMM 구성원이 아니었음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석기시대|초토화]]하자고 주장했다.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다. 문제는 바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 대사로 활동하면서 뮌헨 협정 등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 대한 유화책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즉 르메이는 "니 애비가 한 잘못을 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면박한 거다. 군 장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흑역사]]를 지적한 것만으로도 심각한 모욕인데 애초에 케네디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 조셉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인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다시 말해 "당신도 나이 드니 아버지를 닮아갑니까"라고 깐 셈.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가는데,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자신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 [[미합중국 해병대]][[미합중국 해병대#s-10.1|사령관]] 데이비드 슈프 장군 등 다른 군 장성들과 실컷 대통령 뒷담화를 한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이를 듣고 케네디는 자기 보좌관에게 "'''[[장성급 장교|이마에 별 단 작자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점이 있지. 이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가는 나중에 살아남아서 잘못을 지적해 줄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남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케네디는 [[태평양 전쟁]] 시기 [[미합중국 해군]] [[장교]](최종 계급 [[대위]])로 참전, [[PT 보트|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하였는데 하급 장교 시절 정부의 명령과 군에서 그 명령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데 대해 놀랐고, '''군이 모든 것을 망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 국민들이 놀랄 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 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http://naver.me/5x6QXAff|이 부분]]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더 유리했다. 미국 민방위청이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할 동안 소련은 미국보다 훨씬 앞선 인민 핵방호 태세를 갖췄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케네디는 이때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연구한 바버라 터크먼(1912~1988)의 역사서 8월의 포성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아울러 테일러 장군이 논의 초반에 미사일 전면 제거는 어렵다는 조언을 한 것도 케네디 대통령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 장군은 쿠바 공습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정확한 조언을 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M 내부에서 [[폭격]]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개××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스페인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USS 메인 함 침몰과 비슷한 사건을 조작하자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쿠바 공습을 [[진주만 공습]]에 비교하며 미국에 영원히 불명예를 안기는 격이라며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 36발(사정거리 - 위 지도의 중간원)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 1992년 쿠바 아바나 회의에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리프코프는 1962년에 쿠바에 약 '''160개의 핵탄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숫자는 블러프로 다소 의심되지만 98개라는 말도 있는 등 충분한 양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상호확증파괴|주요 도시에 핵미사일을 날릴 능력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뉴클리어 아포칼립스|소련도 보복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엑스콤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을 통한 습격, 회유 등의 수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했다. 소련에 미국의 단호한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사일을 철수하여 평화적으로 위기를 해결할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다.]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레이저 유도, GPS 등을 이용한 정밀유도무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공습을 한다면 정확성이 보장되지 않는 일반 재래식 폭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 모두를 제거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컸고 그 과정에서 소련 [[군인]]들까지 살상될 경우에도 미소 양국의 정면 충돌로 비화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여기에 문제의 미사일에 관한 CIA 등 정보당국의 분석에서 '소련의 핵미사일이 실전배치 완료되기까지는 약 10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 케네디는 좀 더 차분한 대응에 나설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엑스콤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켜고 끌 수 있었다. 주로 연필꽂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말을 바꾸는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닉슨도 있었던 걸 보면 그것은 닉슨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훗날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어 증언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위에 언급된 로버트 케네디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엑스콤 회의 당시 비둘기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받아왔을 때 불같이 욕을 했다. 로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도 자신이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미국 대중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로버트의 증언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가 형제들이 비둘기파였고, 나머지 관료들이 매파인 것처럼 인식이 됐다. 이는 후술하는 D-13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실제 녹음본에서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비둘기파였다. 협상을 하던 폭격을 하던 미사일 선박이 쿠바로 들어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사일이 쿠바 본토에 배치가 완료되면 협상은 힘들어지고 폭격을 한다 해도 100%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소련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야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다. '''"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 케네디의 녹음 장치는 그의 사후 폐기 처리되었지만 이 장치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닉슨 독트린|닉슨]] 대통령이다. 닉슨은 케네디의 녹음 장치를 더욱 개량해 다시 백악관 집무실에 녹음기를 설치했고 이는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진다.]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다. 덤으로 쿠바에 위치한 소련의 미사일이 서반구 국가를 타격한다면 '''즉각 미국에 대한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핵전쟁|보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http://youtu.be/EgdUgzAWcrw|#]] 전 세계의 정부와 언론들은 쿠바에 시선을 모았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 [[서기장]]이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